부안 관아 입구에 있었던 진석루[일본강점기에 제작된 엽서]

2019년 5월 11일, 제125주년 동학농민혁명 기념식과 함께 첫 번째로 맞는 ‘동학농민혁명 법정기념일’ 기념식이 국무총리와 문화체육관광부장관 등 정부 요인이 참석한 가운데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개최되었다. 125년 전, 부패한 정권을 개혁하고 일본의 침탈을 막아내기 위해서 서울로 진격하던 전봉준을 비롯한 동학농민군이 무참하게 학살당하며 실패한 이후, 125년 만에 국가가 이들의 애국애족정신을 인정하고 기억하는 기념식을 개최한 것이다. 그것도 서울의 심장부인 광화문 앞에서.
동학농민혁명 법정기념일로 제정된 5월 11일은 황토현전승일이다. 황토현전투는 1894년 4월 7일(양력 5월 11), 동학농민군이 전라 감영군을 맞아 벌인 첫 번째 전투였고, 이때의 승리를 계기로 혁명이 전국으로 확산되는 계기가 되었다. 황토현전승일이 동학농민혁명 법정기념일 됨으로써 앞으로 황토현전투와 전승에 대해서 기억하고 기념하겠지만, 이 전투와 승전이 있기까지의 과정에 대해서는 관심을 두지 않아서인지 모르겠지만 그다지 알려져 있지 않다. 특히 부안 사람들조차 백산과 부안지역을 중심으로 전투가 준비되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는 게 현실이다. 

2019년 5월 11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개최된 제125주년 동학농민혁명 기념식 모습

1894년 4월 26일(양력 5. 1) 백산대회에서 혁명군을 조직하고, 전열을 정비한 동학농민군은 광제창생(廣濟蒼生)과 보국안민(輔國安民)의 기치를 높이 들고 전주를 점령할 목적을 가지고 출발하였다. 이때부터 백산과 부안은 황토현전투에 이르기까지 동학농민군의 중심지가 되었다.
한편, 부안의 동학농민군은 백산대회에 참여한 뒤 부안으로 이동한 이른바 ‘백산 여당’과 함께 하동면 분토동[부안읍 모산리 모산 마을(분토동)] 김씨 재실[분포재]에 집결하였다. 이 광경은 홍해 마을에 살던 기행현이 기록한 『홍재일기』에 실려 있다. 이곳에 집결한 동학농민군은 500여 명으로 전하는데, 각각 죽창과 함께 ‘보국안민(輔國安民)’이라고 쓴 붉은 기를 들고 있었다. 또한 부안․고부․영광․무장․흥덕․고창 등의 읍호(邑號)가 적힌 작은 깃발을 들고 있다. 
인근 백산에서 대규모 집회가 개최되었고, 부안에서의 심상치 않은 정황에 놀란 부안현에서는 동학농민군을 진압할 목적으로 장정을 모집하였으나 도망하는 자가 많았고, 민심이 심하게 흔들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읍내에서 씩씩하고 건강한 사람 100여 명을 모집한 뒤 김방헌을 영거대장으로 삼아 전라 감영으로 보내려 하였다.
이에 분토동에 집결한 동학농민군의 일부가 부안 대접주 김낙철과 함께 부안 관아의 동헌에 들어가 “무슨 까닭으로 장정을 모집하는가, 다시는 병정을 모집하지 말라.”며 부안 현감을 질책하였다. 이와 함께 “지금 이들 장정을 모으는 것은 오로지 우리를 방어하려고 하는 것이다. 너희들은 일제히 나가서 각자 자기가 하던 일에 종사하는 것이 옳다.”고 하며 이들을 해산시켰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분토동에 모여 있던 동학농민군은 부안 공형에게 사통을 보내, 시장(市場)에서 일방적으로 물건 값에 따라 세율을 정하여 거두어들이는 잡세(雜稅), 즉 분전수세(分錢收稅)하는 일을 금지할 것 등 4개조의 고치기 어려운 폐단에 대한 시정을 요구하였다. 또 부안읍에 쌓아둔 전곡 가운데 쌀 10석과 돈 200냥을 즉시 보낼 것을 지시하였고, 읍내 신재명(辛在明)의 집에 사 두었던 쌀 120석을 압류하여 다른 데로 실어 가지 못하게 하였으며, 공형[公兄 : 호장(戶長)․이방(吏房)․수형리(首刑吏)]들에게는 지목전(指目錢)이라는 명목으로 4,000냥을 내놓으라고 독촉하였다. 이들은 4월 2일 저녁 무렵 나팔을 불고 북을 치고 총을 쏘며 부안현 서도면(西道面) 부흥역(扶興驛)으로 옮겨 주둔하였다.

전봉준과 손화중이 부안 관아를 점령하고 부안 현감 이철화를 처형시키려 했으나 김낙철이 말렸다는 내용이 전하는 「김낙봉 이력」

이러한 정황은 백산대회 이후 혁명이 본격화되었을 뿐 아니라 동학농민군이 전라도 일대를 서서히 장악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특히 고부 백산에 접해 있는 부안이 그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았음을 보여주는데, 그것은 전봉준과 손화중이 부안을 직접 찾은 데에서 확인된다.
기록에 의하면, 4월 3일 전봉준과 손화중이 동학농민군 4,000여 명과 함께 부안 관아를 점령하고 부안 현감 이철화 붙잡은 뒤 처형시키려 하였다. 이때 부안 대접주 김낙철이 손화중에게 “네 선산(先山)이 이 성 밖에 있으니 나의 성주(城主)가 바로 너의 성주이다. 성주는 부모와 마찬가지인데 어찌 이런 도리가 있는가.”라며 말렸다. 이에 손화중이 김낙철의 적극적인 협조를 요구하고, 김낙철이 이를 수용함으로써 이철화는 처형을 면하게 되었다.
손화중은 밀양 손씨이고, 그의 조상 중에 손비장(孫比長)이라는 인물이 있는데, 손비장은 부안 손씨의 시조로 알려져 있고 묘소가 바로 김낙철이 살던 부안읍 쟁갈리에 있었다. 이를 두고 김낙철이 손화중을 말렸던 것이다. 한편 김낙철은 교주 최시형과 뜻과 달리 전봉준과 손화중 등이 봉기한 것에 대해서 동의보다는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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